040904
어젯밤 새벽녘에야 잠 든 탓에 오늘은 늦게서야 일어나게 되었다.
배낭을 꾸렸다.
제대로 챙겨 넣었을까? 재차 점검하다보니 배낭이 너무 무겁고 뚱뚱해져 있다.
많이 걷게 될 텐데 힘들겠지...고심하다 침낭을 빼버렸다.
그 침낭은 마을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 되돌아 가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갈등하게 만들었다.
동서울터미널.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1분 만에 나온 자장면을 허겁지겁 먹고 차에 올랐다.
기분이 좋아진다.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부석사.
언제부터였을까?
그곳에 가고 싶어 했던 마음을 미루고 미루어 밀쳐 두었던 게...
카메라에 남아있는 전에 찍은 이미지를 다 지워버리고 매뉴얼을 보고 머릿속에 입력하기 위해 애쓴다.
뭐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손으로 쓱 집어들 수 있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얼려둔 커피에 물을 붓고 흔들어 마신다.
나는 언제나 무엇을 할 때 준비가 부족하다.
자주 돌아다니다 보니 배낭을 꾸릴 일이 많다.
머리에 조목조목 정리해 놓으면 편하겠지만 건망증이 장난이 아닌지라 목록을 만들어 미리미리 챙겨두어야 함에도 당일이나 전날 밤에 꾸리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집을 나서면서 뭔가 찜찜한 구석이 느껴지는 것 .
그러고 길을 나서다 보면 하나 둘씩 빠져 버린 게 생각이 나 후회하는 것.
그래서 예상 밖의 지출을 해야 하고 불편해야 하고 덩달아 자책하는 일이 빈번히 생긴다.
어릴 적에는 것도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리 슬쩍 넘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리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결국 북한산에서의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랜턴을 챙기지 못했다.
어디를 가거나 무슨 일을 함에 있어 대개는 후다닥 해 버리는 적이 대부분이다.
내 삶도 그래 왔던 게 아닐까?
전에는 복잡한 단계나 준비 없이 쉬 치러 내기도 하는 것에 그것도 저만의 스타일이라 별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근데 그렇게 시작한 일들에 따르는 마이너스요인과 함께 상응하는 불편함을 인정해야 했다.
즉흥적이고 대책 없는 가운데 갑절의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했던 것.
그렇게 잃어버린 손해는 어디에서든 만회할 수 있었던가?
차는 앞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데 눈을 감으면 나는 오른쪽으로 빙그르르 돌아가고 있다.
어떤 기분 좋은 기류 같은 것에 감겨 회오리처럼 위로 오르고 있다.
풍기와 영주는 사과가 많이 나는 곳이라..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과수원이 즐비하다.
근데 웬 빨강과 보라색 종이들이 사과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라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초록들판에 유독 거슬리는 색채.
깊어가는 가을햇살아래 빛바래고 푸석푸석한 잡초들과 마른 나뭇잎새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선명한 빛을 내는 꽃들이 줄지어 피어있다.
잔잔한 소국과 줄 곳 흔들리는 코스모스, 낮게 핀 팬지.
꽃은 언제나 사람에게 작은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지.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황금색으로 영글어 가는 벼와 아직은 탱탱한 초록의 팔랑팔랑한 콩 이파리, 주채 할 수 없이 발갛게 달아오른 사과를 보면...
부석사로 가는 길목의 마을초입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나란히 서 있다.
지하여장군 등이 몹시 굽었다.
저 할미. 저래서 잡귀를 물리칠 수 있을라나...
나선지 5시간 만에 부석사 매표소를 만나다.
주중이라 역시 사람이 없다.
매표소도 문을 닫아버렸다.
절까지 얼마큼이나 가야할지 감을 잡을 수는 없지만 능선이 끝도 없이 보인다 하니 꽤 걸어야할 걸로 생각했다.
아스팔트로 포장한 게 아쉬웠지만 편편하고 완만한 경사를 올라가자 왼편에 당간지주 2점이 우뚝 서 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옮기자 어이없이 일주문이 눈에 띈다.
이리 가까이 금세 다다를 낮은 지대에 있다니...
오랜 세월을 짐작케 해 주는 묵은 기둥들.
그 사이사이 얼마나 많은 시간의 바람들이 드나 들었을까?
여느 절들과 다른 점은 너른 평지에 지어진 게 아니라 산비탈에 짓다 보니 건물들이 차곡차곡 단계적으로 놓여있어 한 발짝 오를 때 마다 아래세상이며 겹겹의 능선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
무량수전은 제일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편 왼쪽에 이끼에 묻히고 나무와 담쟁이와 잡초에 휘감겨 있는 ‘부석‘을 만날 수 있었다. 옆 바위와의 경계가 모호한 상상보다는 훨씬 큰 돌.
관광객이 끼워놓았을 잔 돌멩이를 치운다면 아랫바위와 떠 있어 보이기는 한다.
저 틈새로 실이 빠져나갔다고?
관광객이 많이 성가시기도 했겠다.
사진을 찍을라치면 불쑥 끼어드는 ‘출입금지‘팻말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신경숙 소설에서 나오는 한 대목 중 ‘한 계절은 사람과의 사이에서의 시름을 잊게 해 준다는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끝이 없이 이어진 능선자락’은 아래 절 지붕과 주변의 나무들에 가려 좁게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일몰시간이 되자 갑자기 사진기와 삼각대를 든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7시 반 나뭇가지에 걸린 해가 이윽고 져 버린 뒤 절을 내려왔다.
소설속의 일주문 지나 줄지어 늘어선 사과나무는 어디있나? 살펴보니 옆의 과수원에 어수선하게 있는 게 다였다.
그보다는 늦가을 묵은 은행나무가 물이 든다면 황금빛으로 탈바꿈할 광경이 근사하겠다.
민박을 정했다.
주인아저씨 마음씨가 후덕하다. 청국장을 시켰는데 큰 쟁반가득 12가지 산채나물과 맹렬하게 들 끊는 청국장이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이틀 만에 대하는 밥상이다.
먹다보니 깍두기 국물에 빠진 작은 나방 한 마리.
그 놈의 바동거림이 안쓰러워 젓가락 끝으로 끄집어냈다.
말간 물에 담갔다 씻겨 건져내야 할 게 아닌가 싶다가 이미 짠물 매운 물을 잔뜩 먹었으니 살기야 할까? 그래. 이리된 것도 네 몫의 명인데 싶어 쟁반위에 내 버려두었더니 이윽고 잠잠해 졌다.
모기 한마리가 왼팔근처에서 앵앵 거리 길래 가차 없이 손으로 낚아챘다.
모기나 파리나 바퀴벌레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살기가 도는 나.
그러나 번번이 눌러 죽이는 것에 실패하는 나는 이번에도 하면서 손가락을 조심스레 폈다.
어이없이 짓눌러진 모기를 털어내자 약지손가락마디에 2군데 손바닥에 1군데 선명하게 피가 묻어있다.
청바지에 쓱 문질렸는데 유성 펜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네.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살아있는 붉은 색.
다시 쟁반아래 틈사이로 뭔가 기척이 있는가 싶어 봤더니 모기 두 마리가 잠자리처럼 교미하는 모양새를 하고 엉켜서 파닥거렸다.
저렇게 방정맞게 움직여서야 제대로 삽입이 될까 싶은...
인간을 포함해 몇몇의 동물들만이 지속적인 짝은 만든다고 하네.
그 외 대부분의 동물들은 관계에 있어 자유로운 편이다.
사람들이 만나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 대상과 섹스라는 걸 하게된다.
근데 그것이 한 대상에게만 국한되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결국은 흥미를 잃게 된다.
해서 각기 시기는 다르지만 대부분 다른 대상을 찾게 되기도 한다.
남자들이나 여자들이 오래된 상대와 치루는 섹스에 대해 가끔 ‘의무방어전’이라는 농이 그저 농만은 아닌 것이다.
사랑이라든가 섹스라는 것은 한 대상과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무엇에 물탄 듯 그리 점차 농도가 옅어져가는 것일까?
그리고 어찌 결혼한 부부사이는 오래 함께 하다보면 드디어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대신하는 편안함이나 안정감 신뢰감 의무감 등등으로 자리바꿈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산속이라 날씨가 꽤 선선하다.
파커를 걸쳤는데도 한기가 느껴서 오래 앉아있을 수도 없다.
동동주 서너 잔을 마시고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 끼쳐오는 열기에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어졌다.
침낭을 가져와서 절간마당이나 아무데 평상에서 자려고 했던 낮의 생각이 떠올라 머쓱해졌다.
새벽예불이 있다는데 일찍 일어 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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