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1 03
청춘이 그것이 지나간 것이다.
참 길고 길었던 허영과 같은 청춘이 정말로 지나간 것이다.
청춘을 보낸 소감은 쓸쓸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청춘의 복무가 끝났으니, 적어도 이제 혁명과 발견을 위한 해일과 같은 난폭하고 무모한 요구들은 가라앉은 것이다.
바다가 빠져나간 갯벌처럼 생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 다정하고 쓸쓸한 기시감.
전경린의 네팔여행기의 서두에 있는 글이다.
보편적으로 10대후반부터 20대까지가 청춘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얼마전 결혼한 홍신자씨는 또 다른 청춘을 맞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내게도 나이를 떠나 청춘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징후들이 있었다.
무심코 본 거울에서 처음 가는 주름을 발견했거나, 옷을 입으면서 튀지않게 입어야 하는것이 아닐까 주저할때, 노후대비 연금상품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할때, 될때로 되라라는 식의 허술하고 무책임한 사고에서 벗어나 문득 진지해져 있는 나를 발견할때...
쓸쓸하고 허무하기도 했는데 안심이 된다거나 다행스럽다기 보다는 후회스러움에 자책을 하면서 이제는 제대로 살아봐야 하지않을까 하는 나름의 반성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작가에게 청춘의 시기는 각별히 힘들었음을 엿볼 수있다.
하긴 누군들 청춘을 무탈하게 보냈을까.
열정과 분노와 여러 감정들을 여과없이 폭팔시켰을 누구도 있었을 것이고 토닥토닥 어르고 다독여 나중의 생을 위한 발전의 밑거름으로 만들었을 누구도 있었을 것이다.
청춘이 끝났다고 느꼈던 시기의 내게는 삶이 갯벌처럼 황량하고 허망하다고 느꼈다.
내게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었으며, 이러저러한 소망은 뜬구름처럼 높다랗게 걸려있어 다가갈 엄두를 못 내고 여전히 나는 스스로의 경멸의 대상이였다.
'바닥을 드러낸 생'이라는 말은 비로소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청춘의 시기를 건너면서 난폭하고 무모한 요구를 가라앉히고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찾고 애정을 가지게 되는 것.
청춘을 봄이라 한다면 지금의 나는 가을에 이른 것이겠지만 아직은 늦여름의 문턱을 넘어서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헐벗고 늦은 감이 있지만 가을이 오기 전 내 생의 바닥에 묵은 소망의 씨앗을 뿌리고 싶다.